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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공부 동맹 ; 쇠얀 키르케고어 읽기 모임 ; 사랑의 역사 첫번째 시간 발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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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큅코리아ga 작성일 23-09-11 23:54 조회 6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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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1일 저녁 9시 쇠얀 읽기 모임
발제자료: Andrew Ga
회의 ID: 213 790 6977 / 암호: 013735

[사랑의 역사] 키에르 케고르

제1부 1장 숨겨진 사랑의 생명

-사랑은 그 열매로 알아볼 수 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를 보아 알게 된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딸 수 없다. (눅6:44)
_사랑을 이용해서 타인과 자신을 속이는 자는 영원한 것을 잃는다.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속임수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나 영원 속에서도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영원한 상실이다. 사랑 때문에 속은 사람은 그나마 사랑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을 도구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사랑과 담을 쌓는 자이고, 영원히 사랑과 담을 쌓는 자이다. 그는 자신을 잃을 뿐 아니라 사랑을 잃는다. 그의 상실은 회복할 길이 없다.
_사랑에 속기만하며 살아온 자에게는 보상이 따른다.
그에게는 영원한 분이 풍요한 보상을 준비해 두신다. 사랑 때문에 인간의 속임에 희생된 사람은 영원 안에서, 그것이 뒤집혀서 사랑이 영속 된다면 과연 실질적으로 그가 잃은 것은 무엇이겠는가? 자신이 참된 사랑을 실천 하는 중에 속은 사람은 아무것도 잃지 않은 사람이다.
_ 슬기라는 덫에 빠져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
"슬기라는 덫" 에 빠져서 슬기롭게도 자기 자신을 맹랑하게 속이는 사람은 일평생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영원 속에서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이 드러날 경우에, 과연 그가 잃지 않고 남길 것이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어떤 이는 덧없는 세상에서 사랑 없이도 그럭 저럭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가 어쩌면 자기 기만을 깨닫지 못하고 삶을 미꾸라지처럼 성공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또 스스로를 속이고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둘지도(거두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 그는 영원 속에서 사랑을 누리지 못할 것이고, 일체의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_영원한 분은 다 알고 계신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그런 불손한 자를 무서운 방법으로 응징하기 위해, 자신의 전능하심을 다 발휘할 필요가 없고, 다만 약간 골려주시기만 할 뿐이다. 한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맺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유일한 이음줄이다. 그런데 사랑이 번거로운 짐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경우, 덧 없는 세상에서 영원과의 유대를 벗어던지는 것이 감성적인 인간에게는 큰 짐을 더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_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들
어떤 사람이 편향적인 "자기사랑(자기애성 집착현상) "인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과오를 범하는 경우가 있다. 에로스의 사랑에 불과한 자기사랑을 포기해야 할 사랑의 과제에 대해서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사랑에 대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또는 대수롭지 않은 관용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과오를 범할 경우가 그렇고, 또 싸구려 동정의 눈물이나 더러운 애착이나 본질적인 허영이나 이기적인 교제나 아첨하는 뇌물이나 찰나적인 외모나 일시적인 관계 따위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그렇다. 참된 그리스도(교)인의 사랑은 그 자체 안에서 영원한 진리를 드러내 보여준다.
다른 모든 사랑은, 인간적으로 말해서 그것이 속절 없이 시들어버리거나 일시적으로 꽃피었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지속되고, 또 바로 그런 까닭으로 해서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존재한다.
_사랑의 여러 줄기
하나님께서는 빛 속에 살고 계신다. (딤전6장16절)
(딤전 6:15)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딤전 6:16)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거기로 부터 세상을 비추는 빛줄기를 흘려보내신다. 세상에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이 경험하는 어떤 빛 줄기를 파고들어도 하나님께는 이르지 못한다. 빛을 등지고 걸어갈 때 그 빛은 밝게 비추지만 빛을 향하여 돌아서는 순간 빛을 어둠으로 바꾸어 놓듯이 그렇게 된다. _ 돌기둥이 될 위험
호기심에서 대담하게 빛의 원천을 찾아내려고 하는 자는 장님으로 만들어서 벌을 받게 만든다. 신앙은 손짓하며 생명의 길로 인간을 인도하기 위해 인간의 반려가 되기를 자청하지만, 대담하게도 신앙을 지적으로 파헤치는 일에만 몰두하는 자에게는 돌 기둥으로 만들어버린다.
_ 두려워 해야 할 대상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며 경배하는 자에게만 진리의 빛은 물론 지식의 줄기를 보여주신다. 우리는 육신을 죽이는 자(마태복음 10장28절)나 위선자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두려워해야 할 분은 단 한 분, 즉 하나님 뿐이시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 뿐이다. 참으로 하느님을 향해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자기 자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결코 위선에 속지 않는다. 그러나 위선과 자만을 부산스레 살피고 다니는 사람은 그가 성공을 하든 못하든 간에 그것 자체도 위선이 아닌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외형은 결코 사랑의 열매일 수 없기 때문이다.
__위선자의 가면을 벗기는 사랑
반대로 그의 사랑이 사실로 자신의 열매를 맺는 사람은 그가 원하지도 않고 애쓰지 않아도 그에게 접근하는 모든 위선자의 가면을 벗게 하고 수치까지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사람은 아마도 그런 것을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위선에 대한 가장 엉성한 방어는 분별이다. 아니다. 그것은 방어라고조차 할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위선의 위험스러운 이웃이다. 위선에 대한 최선의 방어는 사랑이다. 그렇다. 그것은 방어책일 뿐만 아니라 크게 입을 벌린 심연이기도 하다. 사랑은 영겁을 두고 위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위선자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는 것, 이것 또한 사랑을 알기에 충분한 열매다.

제2-1 그대 사랑 "하라"

"둘째는 이러하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마태복음 22장39절 _자기사랑을 극복하기 위한 이웃사랑 (P39)
_자기사랑의 최후, 다리가 부러진 야곱처럼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난 후에 다리를 절었듯이(창32장 31절), 자기 사랑도 이 말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와 싸운다면 야곱의 다리처럼 부러질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가장 심오한 은신처를 심판하듯이 자기 사랑에게 추호도 변명의 여지를 남겨주지 않으며, 어떤 작은 도피구도 남겨주지 않는다.
_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의도
한편 "둘째는 이러하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말씀은 진정한 자기사랑을 배우지 않은 채, 욕심에 이끌리어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매여있지 않도록 가르치려는 의도의 말씀이다. 세상에 어떤 싸움보다 이기적인 자기 사랑의 방어전처럼 지루하고, 무섭고, 복잡한 싸움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단 일격에 요절을 내어버린다.
_ 아름다운 현기증: 에로스적인 사랑
그것은 아직 영원한 것이 못 된다. 그것은 무한성을 빚어내는 아름다운 현기증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는 걷잡을 수 없는 표현까지 서슴치 않고 시도한다. 인간이 영원한 사랑의 진리로서,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곧 하나님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 자신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대의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그대의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웃을 자기에게서 떨어버리기 위하여, 누가 이웃인지 아리송하게 만들어 버렸다 (눅10장29절).

_ 그렇다면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
이웃이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그대와 가까운 데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편애하라는 말이 아니다. (마5:46-47) 이방인도 그런 일은 한다. 이웃이라는 개념은 사실 우리 자신의 자기중복을 말한다. (p42)
_ 올바른 자기사랑을 배우라.
자신을 사랑하는 올바른 방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수도 없다. 우리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완전히 서로 상응한다. 근본적으로 이 둘은 하나이고 또 같은 일이다.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의 목숨에 손을 대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지 못하는 죄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각자의 자신 속에 가장 위험한 배반자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_ 그대는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한다는 것이 의무일 때만 오로지 그때만 사랑은 영원히 모든 변화에 대하여 안전하고, 사랑은 영원히 축복 된 독립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사랑은 영원히 행복하게 절망에 대하여 안전하다. 사랑하라는 의무를 실행하는 자는 자기 이웃이 누구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사랑해야 할 이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p56)
_ 질투에 대하여
질투는 사랑을 받은 만큼만 사랑한다. 질투는 자신의 선입관에 시달려 노심초사하며 감히 사랑하는 사람을 전폭적으로 믿지도 못하고, 또 전폭적으로 자신을 바치지도 못한다. 이는 상대에게 너무 많이 주어서 자기편에서만 불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질투가 개입된 사랑은 실상 불안만이 타오를 뿐이다. 질투는 백개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을 안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이는 다양성과 통일성보다 허약한 사랑이다. 산산조각 난 마음이 분열되지 않은 온전한 마음보다 의심스러운 일이다. (p67)
_자연발생적 사랑의 한계
자연발생적인 사랑은 해가 지나면서 바뀔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명의 싱그러움을 잃는다. 그것은 마치 기름이 떨어진 등불처럼 사그라든다. 그 사랑을 다시 불붙게 하는데 쓸 새 기름(마25:1~)을 어디서 얻어야 할지 모르는 것과 같다. 결과는 불쾌하고, 안절부절하고, 사랑에 지치고, 자신의 사랑이 하찮아진 것에 지치고, 다시 변모시킬수 없다는 것에 지치고 만다. 애석하게도 자연적인 사랑은 영원성의 변화를 거치지 못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치유를 받을 기력마져 잃게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서글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p69)
_ 영원한 것은 습성이 되지 않는다.
습성이란 항상 변화되지 않을 수 없다. 반대로 불변하는 것은 변화될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안될 그런 것이다. 영원한 것은 결코 낡지도 않고 또 습성이 되지도 않는다. 사랑하는 것이 의미일 경우에만 오로지 사랑은 축복받은 독립적 지속성 속에서 영원히 자유로워진다. (p71)
_ 독립적 자기사랑은 비겁한 독존에 머물러 있고 그 비겁함 때문에 발 붙일 곳이 없는 것이다.
자기사랑에 머문 습성은 발 붙일 곳이 없어서 무장한 노상강도처럼 이리저리 헤매게 된다. 고고한양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저 비참한 독존을 찬양해야 할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반대로 의무가 됨으로 써 영원히 변화를 입은 사랑, 그래서 사랑해야만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랑은 자신의 존재의 법칙을 영원한 것에 대한 사랑의 관계 안에서 가지고 있다. 이 사랑은 믿음 곧 의존적이고 동시에 그것을 갚안나가는 의무에 속한다. 의무로서의 사랑은 홀로 진정한 자유를 낳게 한다. 자연발생적인 사랑은 어느정도 자유롭게 하지만, 다음 순간에 보상을 요구하는 상대적이고 의존적인 것이 되고 만다. (p71)
_ 축복된 독존
"그대 해야만 한다"는 축복된 독존 안에서 사랑을 자유롭게 한다. 이런 사랑은 사랑이 대상속에 있는 온갖 변화와 더불어 흥망을 함께하지 않고, 영원한 율법과 더불어 흥망을 함께한다. 이런 사랑은 쓰러지는 일이 없다. 이런 사랑은 이것이나 저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 하나에 의존한다. 자유롭게 하는 것에만 의존한다. 그리서 그것은 영원히 독존적이다. 한편 의무가 됨으로써 영원의 변화를 입은 사랑은, 바로 그것이 절망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절망하는 법이 없다. 절망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어떤 것, 예컨대 행운이나 불운과 같은 그런 사건이 아니다. 절망은 인간의 내밀한 곳에 있는 엇갈림이다. 어떤 운명이나 사건도 그렇게까지 멀리 그리고 또 깊이 침투 할 수는 없다. 사건이란 다만, 거기에 엇갈림이 있다는 사실만을 드러나게 할 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절망에 대한 안전보장은 단 하나가 있을 뿐이다. 즉, 그것은 "그대 해야만 한다"는 의무를 통하여 영원의 변화를 입는 일이다.
_ 그대 슬퍼해야만 한다.
"그대 슬퍼해야만 한다"는 이 말은 참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삶의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해질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슬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절망할 권리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슬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슬픔을 멈출 권리도 없다. 왜냐하면 나는 슬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대는 이 감정에 대하여 무감각해질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사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절망적으로 사랑할 권리도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사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또 그대는 이 감정을 그대 안에서 그릇되게 사용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사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사랑을 보존해야만 하고, 그대 자신을 보존해야만 하고, 또 그대 자신을 보존함에 있어서, 그리고 보존함으로써 사랑을 보존해야만한다. 한갓 인간적인 것이 저돌적으로 전진하려는 곳에서, 계명은 이를 억제하여 준다. 한 인간적인 것이 용기를 잃으려는 곳에서, 계명은 힘을 북돋아준다. 한갓 인간적인 것이 지치려하거나 영리해지려고 하는 곳에서, 계명은 불을 붙여주고 지혜를 준다. 계명은 그대의 사랑 속에 깃들인 불건전한 것을 없애버리거나 불태워버린다.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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