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청년을 살피다 (1) 공정과 자유, 청년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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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7-10 15:39 조회 20회 댓글 0건본문
최병학 목사
"증상(symptôme)은 은유(métaphore)이고, 욕망(désir)은 환유(métonymie)이다."
오늘날 청년들의 문화 현상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갓생, 번아웃, 은둔, 혐오, 팬덤 정치, 코인 투자, 탈조선, 비혼 문화는 서로 다른 현상처럼 보이지만, 그 밑에는 하나의 공통된 불안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나는 이 사회에서 버려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에 따르면 증상은 은유이다. 증상은 개인의 병이 아니라 사회가 말하지 못하는 진실이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다. 갓생은 성실함의 문화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멈추면 탈락한다."는 불안이 숨어 있다. 은둔은 게으름이 아니라 "더 이상 이 사회의 경쟁 규칙을 감당할 수 없다."는 몸의 항의이다. 코인과 한탕주의는 탐욕만이 아니라 성실한 노동으로는 미래를 만들기 어렵다는 절망의 표현이다. 비혼과 저출산 역시 이기주의가 아니라 사랑과 가족마저 비용과 위험이 된 사회가 만들어 낸 증상이다. 청년 문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병을 드러내는 은유이다.
또한 라캉에 따르면 욕망은 환유이다. 욕망은 하나의 대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른 대상으로 이동한다. 청년들은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집, 돈, 인정, 자유를 욕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욕망의 가장 깊은 곳에는 더 근원적인 갈망이 있다. 그것은 버려지지 않을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 존재 자체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다. 결국 청년이 원하는 것은 성공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존엄이다.
이러한 욕망을 더욱 왜곡시키는 것이 AI 시대의 자본주의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노동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으며, 생산의 중심은 노동에서 데이터와 알고리즘, 그리고 자본의 소유로 이동하고 있다. AI를 소유한 기업과 투자자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반면, 많은 청년들은 점점 더 불안정한 노동시장으로 밀려난다. 노동은 줄어드는데 자본은 더욱 집중된다. 그럼에도 사회는 여전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를 반복한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노력만으로는 구조적 격차를 극복하기 어려워진다. 청년의 불안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AI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구조적 증상이다.
반대로 언더도그마(underdogma)가 등장한다. 약자라는 위치 자체를 새로운 도덕적 권위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청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능력주의가 승자의 인정 욕망이라면, 언더도그마는 피해자의 인정 욕망이다. 하나는 성공을 통해, 다른 하나는 피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둘 다 타인의 인정에 자신의 존재를 의존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가진다.
따라서 대안은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을 전환(conversion of desire)하는 것이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경쟁 욕망도, 더 깊은 피해자 의식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창조적 욕망(creative desire)이다. 창조적 욕망은 남을 이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함께 새로운 삶과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는 욕망이다. 그것은 경쟁보다 협력, 소비보다 창조, 소유보다 관계, 성공보다 공동선을 지향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창조적 욕망이 바로 카리타스(caritas)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가 말한 쿠피디타스(cupiditas)가 소유하고 지배하고 인정받으려는 자기중심적 욕망이라면, 카리타스(caritas)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자신을 열고 함께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욕망이다. 카리타스는 욕망을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을 하나님 나라를 향한 창조적 에너지로 전환한다.
AI 시대의 카리타스는 단순한 자선이 아니다. 그것은 AI가 창출한 생산성과 부를 공동선을 위해 나누고,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에도 모든 사람이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를 다시 조직하는 사랑의 정치경제이다. 따라서 교회는 단순히 어려운 청년을 위로하는 곳이 아니라 창조적 욕망을 훈련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경쟁으로 고립된 청년들이 함께 식사하며 서로의 삶을 경청하는 카리타스 식탁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예배당은 공부와 상담, 문화와 돌봄이 이루어지는 마을 카리타스 센터가 될 수 있다. 청년들은 노인, 장애인, 이주민 등 지역의 약자들과 장기적인 관계를 맺는 방문 돌봄을 통해 봉사가 아니라 관계의 영성을 배울 수 있다. 협동조합, 로컬푸드, 공유부엌, 마을카페와 같은 공공선(Common Good) 중심의 마을경제는 경쟁과 효율이 아니라 협력과 상생을 실험하는 공간이 될 수 있다. 또한 하나님 나라 시민학교는 청년들이 신앙과 시민성을 함께 배우며 노동, 주거, 환경, 돌봄과 같은 사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공적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실천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훈련이다. 혼자 성공하기 위한 욕망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욕망으로,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함께 창조하려는 욕망으로, 인정받기 위한 욕망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욕망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년 문화의 증상은 제거해야 할 병이 아니라 읽어야 할 언어이다. 그 언어를 통해 우리는 한국 사회의 불안과 폭력, AI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불평등과 경쟁의 구조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욕망을 카리타스(caritas)라는 창조적 욕망으로 전환할 때, 청년은 더 이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새로운 공동체와 새로운 경제, 새로운 문화를 함께 창조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교회의 미래는 청년을 경쟁에서 이기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교회의 미래는 청년이 카리타스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함께 창조하는 시민이 되도록 돕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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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학 목사.hwp (17.0K) 0회 다운로드 | DATE : 2026-07-10 15: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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